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이클 케인 (문단 편집) == 활동 ==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영화사의 사환 등으로 일하다가[* 이때의 그는 동네를 쏘다니는 껄렁껄렁한 아이들 중 한 명이었다고 한다.] '''[[6.25 전쟁]]에 [[알보병]]으로 참전한 이력'''으로도 유명하다. 1951년 [[영국군|영국 육군]]에 징집되여 [[서독]]의 [[이제르론]]에 주둔하던 중 파병부대에 지원하면 빨리 제대시켜주겠다는 제안에 혹해서 1952년부터 [[주한영연방군]] 로열 퓨질리어 연대 소속 사병으로 6.25 전쟁에 참가했다가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겼다. 인터뷰에 의하면 [[남양주시]] 근처의 골짜기로 정찰을 나섰다가 얼어붙은 논 위에서 [[중국 인민지원군|중공군]]에 포위당해서 4명의 분대원 모두가 전사하거나 포로가 될 위기에 처했는데, 퇴로를 미리 차단하려고 하던 중공군의 허를 찔러 일부러 적진을 향해 전력질주한 덕에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다고. 이 경험은 훗날 강렬한 트라우마로 남아 그의 인생 전체를 규정하다시피했고, 그런 인연 때문인지 영국에서 만들어진 유일한 6.25 전쟁 관련 영화인 <한국의 언덕(A Hill in Korea)>(1956)에 출연하면서 자문 역할을 맡기도 했다.[* 당시 시대 영화는 한국군의 역할을 잘 부각안하는데 이 영화에서는 주한영연방군 파견 한국군(지금은 폐지된 KATCOM, [[KATUSA]]와 같은 목적이다)이 조연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개인적으로 [[사회주의]]에 호의적이었으나 한국전 참전을 계기로 생각이 바뀌었다고 한다. 군 복무가 끝난 이후 그는 영국으로 돌아와 배우가 되어야겠다고 마음먹고 극단에서 무대감독 보조로 일하기 시작했다. 원래 쓰려고 했던 예명은 '마이클 스코트'였는데, TV 시리즈에 캐스팅 제안을 받고 영국 배우노동조합에 가입하려고 보니 거기에 이미 마이클 스코트란 배우가 등록되어 있었다. 그래서 케인의 에이전트가 그에게 전화를 걸어 30분 안에 이름을 생각해내라고 했다. 당시 그는 런던의 시네마 메카 레스터 광장에 있었는데, 거기서 케인이 아주 좋아하는 배우였던 [[험프리 보가트]]가 주연으로 나온, [[태평양 전쟁]]기 [[미 해군]] [[소해정]]을 배경으로 한 영화 케인 함의 반란(1954)이 상영되고 있었고 그리하여 '마이클 케인'이라는 이름이 탄생했다.[* 동생이자 같이 배우 생활을 잠깐 같이 했던 스텐리 케인(Stanley Caine)도 형을 따라 성을 바꾸었다. 동생은 2013년에 백혈병으로 사망. 생전에 형과는 사이가 그다지 좋지 않았다고 한다.] 그가 본격적으로 두각을 나타내게 된 것은 역사/전쟁 영화인 줄루(1964)와 세태 코미디 영화인 알피(1966)를 통해서였다.[* 다만 줄루에서는 19세기의 영국군 장교역을 했는데 거만하게 오른손이나 뒷짐지고 다니는 손도 못 쓰는 연기자라는 평을 들었다. 나중에 마이클 케인의 회고에 의하면 '''찰스 황태자'''의 거만 떠는 모습을 참조했다고 한다.] 이후 [[국제 첩보국]][* 1965년 작. 원작명 The Ipcress File. 007 시리즈가 점점 판타지로 직행하는 것에 실망한 초기 제작진들이 뭉쳐서 만들었다. 사실적이면서도 굉장히 독특한 분위기를 가져서 007을 능가하는 60년대 최고 첩보영화로 꼽히기도 한다. 마이클 케인은 주인공 해리 파머를 3편까지 맡았다. 두꺼운 안경을 쓴 범생이같으면서도 은근히 불량함이 넘치는 첩보 요원 역할이다.]에서 인기를 얻었고, [[이탈리안 잡]](1969)에서는 코크니 출신의 젊은 범죄자 찰리 크로커, 겟 카터(1971)에서는 런던의 갱스터 잭 카터로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이 시기에는 [[공군 대전략]](1969)을 위시한 2차대전 영화에도 위관급 장교역으로 종종 출연했고, 이것은 70년대 들어서는 독수리는 내리다(1976)와 [[머나먼 다리]](1977) 등에서의 강인한 영관급 야전 지휘관 역할로 이어졌다. 서술된 《줄루》, 《알피》, 《국제 첩보국》, 《이탈리안 잡》, 《겟 카터》는 영국 영화 협회 BFI가 선정한 역대 최고의 영국 영화 100편에도 선정되는 등 60~70년대 자국내 활동만으로 한 획을 그었다. 80년대 들어서는 미국에서도 크게 활약한다. 1980년 [[브라이언 드 팔마]] 감독의 [[드레스드 투 킬]]에서 예상을 깬 반전의 역할로 주목받았고, 1983년에는 드라마 리타 길들이기로 골든글러브 최우수 남자배우상과 전미배우조합상을 동시에 받았으며, 마침내 1987년에는 한나와 자매들로 그의 첫번째 오스카상을 받게 되고 2000년에는 사이더 하우스로 그의 두번째 오스카상을 쥐게된다. 그 후로는, [[오스틴 파워]]의 아버지 역, [[크리스토퍼 놀란]]의 [[다크 나이트 트릴로지]]에서 [[배트맨(다크 나이트 트릴로지)|브루스 웨인]]의 집사 [[알프레드 페니워스(다크 나이트 트릴로지)|알프레드 페니워스]] 역 등의 조연으로 활약하며 제2의 전성기를 맞이했다. 마이클 케인은 크리스토퍼 놀란과 인연이 깊어서, [[배트맨 비긴즈]](2005) 이래 [[프레스티지(영화)|프레스티지]](2006), [[인셉션]](2010), [[인터스텔라]](2014), [[테넷]](2020)을 위시한 거의 모든 놀란 영화에 출연해서 화제가 되었다.[* 후술되지만 덩케르크에서는 목소리로만 출연했다.] 놀란은 인터뷰에서 명배우인 케인을 존경할뿐더러 영화의 성공을 불러오는 '행운의 부적'으로 간주한다고 밝힌 적이 있다. [[아카데미 시상식]] 남우조연상(1987,2000) 2회 수상, [[골든글로브]] 남우주연상 2회, 영국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전미비평가 협회 남우주연상, 전미 배우조합 남우조연상 수상같이 수상 경력도 굵직하여 2000년에는 영국 왕실로부터 기사 작위(Knight Bachelor)도 받았다. 다만 1987년에 [[우디 앨런]]이 감독한 영화 [[한나와 그 자매들]]에 나와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을 처음 받을 때 '''졸작 [[죠스: 더 리벤지]]'''에 나오느라고 시상식에 나가지 못했다. 그러나 그렇게 찍은 영화가 흥행과 평에서 쫄딱 망한 탓에 사람들은 되려 케인을 안타깝게 여겼고,[* 그러나 정작 케인 본인은 하나도 신경 쓰지 않는 태도를 보여줬다. 한 인터뷰에서 "'''그 영화를 보진 않았지만''' 들리는 말로는 끔찍하다더군요. 하지만 (출연료로) '''그 영화가 지어준 집은 아주 멋졌어요.'''"라는 명언을 남기기도 했다. 다른 인터뷰에서도 “일단 위대한 역할들을 찾는다. 위대한 역이 오지 않으면 적당한 역할을 구한다. 적당한 역이 오지 않으면, 집세를 낼 수 있는 역을 구한다”며 작품을 고르는 기준을 밝힌 바 있다.] 2000년에는 라세 할스트롬 감독 영화인 사이더 하우스 룰스로 13년 만에 아카데미상을 받았는데 이번에는 당연히 시상식에 나가 상을 받았다. 노동 계급 출신으로 별다른 정식 연기 공부 없이[* 영국 영화/연극계는 값비싼 사립 연기 학교 중심으로 흘러가는 곳으로 유명하다.] 바닥에서 시작해 한 국가의 국민성을 대변하는 위치의 배우로 올라섰다는 점에서 [[숀 코너리]]와 흡사하다. [[러디어드 키플링]] 원작의 걸작 모험영화 왕이 되려던 사나이(1975)에서 공연하기도 했던 이 두 사람은 실제로도 막역한 친구 사이다. 저서 <명배우의 연기수업(원제 'Acting in Film: An Actor's Take on Moviemaking')>은 케인의 연기 인생과 연기 노하우, 그리고 배우로서의 행동 지침 등이 세심히 쓰여 있는 책이다. 혹시 영화배우를 꿈꾼다면 <명배우의 연기수업>을 꼭 탐독하는 것도 좋다. [[이명세]] 감독이 "배우를 꿈꾼다면 무조건 읽어라!"라고 할 정도로 강추했던 서적이다. [[나우 유 씨 미: 더 세컨드 액트|나우 유 씨 미 2]] 촬영 이후인 2015년 12월 이후 은퇴를 계획 중이라고 했다. 연기에 임할 때마다 '오스카 상을 수상하거나' 혹은 '돈을 벌거나' 둘 중 하나였다고 하는데 오스카상도 이미 2개나 수상했고 돈도 충분히 벌었기에 더 이상 연기에 욕심이 없다고 한다. 하지만 [[크리스토퍼 놀란]]의 비밀 프로젝트에는 자신도 참여할 것이라 밝힌 것을 보면 꼭 그런 것만 같지도 않았는데... [[덩케르크(영화)|덩케르크]](2017)의 초반에 무전기에서 들리는 영국 공군 포티스 편대장의 목소리로 카메오 출연했고, 이것은 [[영국 본토 항공전]]을 다룬 걸작 [[공군 대전략]](1969)에서 케인이 맡았던 역할에 대한 오마주라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